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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있다.

상상해보라, 돈이 없는 세상을!

by 워니준 2021.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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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었다.

가진자들은 탐욕에 눈이 멀었고, 못 가진 자들은 생계를 위해 돈만을 쫓는다.

 

인간이 서로 무엇이 잘나고 못났길래, 부의 불평등을 안고 살아야 하는가?

지금의 부익부 빈익빈이 타당할 만큼 귀천이 있을까? 합당한 불합리 일까?

악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 시대가 타당한 시대인가?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같이 살아야 행복한게 인간이다.

공산주의 같이 보이겠지만, 일단 상상해 보자.

없어도 모두가 같이 없고, 있어도 모두 풍족한 세상을.

서로 우열을 가리지 않으며, 힘들때 서로 의지하고, 있을때 나누고 함께 즐기면서 질투와 권위의식이 사라질 것이다.

 

돈이란게 본디 무엇이었나?

물물교환의 수단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금본위제를 탈피한 이 후로 돈을 마구 찍어내게 되었고

한계없는 자본의 축적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 거대한 자본으로 거대한 실물을 생산하고 거래한다.

큰 건물이 생기고, 첨단 제품이 생겨난다. 가구마다 자동차가 보급되고 국경 간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그 가치가 인정되는 만큼 인류에게 편안함을 제공한다.

여자는 가사에서 해방되었고, 남자에게도 고된 육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삶이 많이 편리해진 인류는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경험하였다.

 

인구가 성장함과 동시에, 지구에 쓰레기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도시는 오염되가고, 자연은 파괴되어 간다. 자원도 소진되어 가고, 환경오염은 증가한다.

다 인구 증가의 탓이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데, 인간이 자연에게 죄를 지은 만큼

자연은 돌려준다. 엄격하리 무서운 것이 자연이다. 어떤 무시무시한 자연재해가 닥칠지 모른다.

그래서 기득권 최고 꼭대기층은 못 가진자에게 책임을 물어 자손 번식을 막고 건강을 악화시켜 인구를 조절하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동족 살해가 아닌가?

 

이게 돈을 마구 찍어낸 결과이다. 파이를 끊임없이 늘려버렸기 때문에 인구 증가로 귀결되는 것이다.

인류는 금본위제를 벗어나면 안 되었다. 한계가 존재 해야 했다. 인류의 한계를 정해놓고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자연의 한계까지 벗어나 버렸다. 인간의 탐욕때문이다.

 

물은 끓으면 기체가 된다. 100도씨를 넘기면 상태가 변화된다. 자연은 한계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정한 기준은 자꾸만 변했다. 물의 끓는 점을 100도씨에서 101도로 102도로, 120도에서 200도까지 변화시켜 상태변화를 시키지 못했다. 200도씨의 물이라... 분자들 간의 엄청난 마찰과 열, 운동량을 생각해보라. 그 상태가 인류의 상태이다. 그 물은 어떠한 생명체도 살지 못할 것이고, 고통만 주는 쓸모없는 물일 것이다. 왜 인간은 상태변화 할 생각을 못하고 끓는 점을 높이려는 생각만 했을까.

 

상태변화란 의식의 변화이다. 정신문명의 개화이다.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 인류는 물질 성장의 적정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하며, 정신문화를 개조했어야 했다. 공생의 시대로 변화했어야 했다.

 

가진자는 탐욕으로 인해 돈밖에 보지 못하며, 못가진 자는 가진자들의 이기심 때문에 생계를 위해 돈만 보고 간다.

돈만 보고 가는 결과가 거시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생각안하며, 공동체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개인의 이기적인 생각으로만 눈앞에 것만 보고 달려간다. 다, 돈 때문이다. 집단의 생존 감각, 센서를 마비시켰다. 퇴폐문화도 한 몫 한다.

 

돈이 사라졌다고 상상해보자.

노동의 의욕이 사라질까? 잠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은 각자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의식주를 어떻게든 해결해 간다. 잠시 첨단 기술과 과학의 발전은 늦춰질 수 있다. 하지만 덕분에 쓰레기는 눈에 띄게 줄었다. 견물 생심이라 했던가.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 욕심도 사라졌다. 따라서 번뇌도 사라졌다. 남과의 다툼도 줄었다. 옛 농경사회로 돌아간 것 같다. 조상님들 처럼 품앗이라는 개념으로 서로를 도우고 상생하며 사셨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자. 첨단 과학의 기술의 발전이 꼭 필요한가? 인간은 꼭 달에 가야만 하는가? 다른 행성에 가야만 하는가? 지구를 파괴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잘 살면 되는 문제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꼭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걸 운용하는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파괴도 가속되고 불량 식품의 증가로 건강문제도 늘었다. 공중에 전자파노출 수치도 올라갔고 원인모를 질병의 원인이 됐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본능이다. 본능. 산이 있기에 거기에 오르고 달이 있기에 간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본능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지구의 패권을 선이 잡느냐, 악이 잡느냐에 따라서 과학 기술의 발전은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열지 말아야 할 온갖 악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돈이 없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사람은 각자의 재능과 적성이 있다. 꼭 돈 때문에 하는일 만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하면 할 수록 기쁜 자아실현이 되는 것 같은 일들이 있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마치 사주팔자 처럼말이다. 사주팔자를 보면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돈이 사라졌으니, 물질적인 대가가 사라졌으니 모든 일은 봉사의 개념이다. 대가없는 희생이다. 봉사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선한 마음과 행동에서 나오는 기쁨과 행복을. 보람과 만족감을 알 것이다. 포인트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봉사개념으로 일을 한다면 집중 대상이 돈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행복을 위해 더 신경을 쓴다. 돈을 받았으니 의무감에서 하는 형식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더 진심어리고 센스있는 서비스가 된다. 겉치레가 아니라 실속있고 효율적인 서비스가 제공된다. 돈을 지불했으니 행패부려도 된다는 진상도 사라질것이다. 돈이 아니라 사람, 남을 위해 일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남이 행복이 내 행복으로 느껴지는 건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적자생존이라 했던가. 이런 선한 사람이 더 많이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돈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돈에 대한 주의는 옛 성현, 현자들도 백번 동의하는 말씀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세상이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등 수많은 성현들이 바라왔던 세상이 아닐까. 어쩌면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가 꼭 가야할 길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기술 발전이 하늘이 허락한 길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심판이라는 개념이 왜 있을까?

 

저런 유토피아가 만들어지기 까지는 인류는 색다른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고차원의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더 이상 공장식, 암기식, 순위 매기는 답없는 쓰레기 교육이 아니라 훨씬 더 가치있고 사랑이 넘치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그 교육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인 것이 중요시 되는 교육일 것이다. 이승에 대한 교육 뿐만이 아니라 저승에 대한 교육 또한 함께할 것이다. 저러한 세상은 저승에서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부처님이 기뻐하실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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